오토 1세(Otto I, 912~973) 때 이르러 교황인 요한 12세(Joannes XII, 938?~964)의 파병 요청에 따라 이탈리아로 출정하고 962년 교황으로 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관을 받게 된다. 그 황제관을 받게 될 때 오토 1세는 요한 12세에게 "①황제의 의사에 반대하는 사람은 교황이 될 수 없다. ②서임권은 황제에게 있다." 라는 2가지 조항을 제시하고 요한 12세는 이 요구를 승인하였다.
이때까지 본 내용만 하더라도 황제와 교황의 관계에서 황제의 우위가 확실하였다. 오토 1세 때 이르러 황제의 권력은 더욱 막강해 졌고, 교황은 황제에게 어떠한 반항,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표적으로 11세기에는 하인리히 3세(Heinrich III, 1017~1056)는 로마 교황을 3번이나 바꿨다. 그러나 그는 빨리 죽게되고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4세(Heinrich IV, 1050~1106)가 황제자리를 물려 받게 된다. 아직 나이가 어렸던 황제대신 어머니인 아그네스(Agnes)가 섭정을 하게된다. 남편과는 달리 아그네스는 독실한 신앙심으로 교황의 권력을 강화시켜주게 한다. 섭정이 끝나고 하인리히 4세가 통치를 할 때 교황인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1020 ?~1085)가 1074년, 1075년 사순절 종교회의를 통해서 사제의 결혼금지령과 서임권을 교황에게 돌려라는 조안을 발표한다. 그가 이러한 발표를 하게된 이유는 이렇다.
사제의 결혼금지령을 통해서 사람, 성직자를 구분시켜서 성직자의 권위를 강화하려고 했고, 인간ㅡ교황ㅡ신 관계의 구조를 만들려고 했다. 물론 황제는 결혼을 하므로 인간에 속하였으며, 그러한 인간이 어떻게 사제를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가하여 서임권을 교황의 권력에 포함시켜서 교황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당연히 하인리히 4세는 화가나서 1076년 교황을 폐위한다. 이에 대항하여 그레고리오 7세는 1074년 사순절 종교회의에서 황제를 파문(excommunication)시킨다. 그 이후는 모두가 익히 아는 카노사의 굴욕이다.
가까스로 사면 받은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편을 들었던 주변의 제후들을 1080년 까지 제거하여 결국 카노사의 굴욕 7년(1085) 만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킨다.
그 이후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은 십자군에 의해서 잠시 소강 상태(솔직히 십자군 전쟁에서도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이 있었다. 예를 들면 교황의 명령인 예루살렘의 정복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동부 유럽으로 진출한다거나)를 보이다가, 1215년 제4차 라테란종교회의(Lateran Council)에서 황제의 의미를 Rex와 Imperator로 둘로 나누었다. 곧 Rex는 불완전한 왕이고 Imperator는 완전한 왕을 말한다. 이러한 Imperator가 되기 위해서는 신의 승인 즉, 교황에 의한 대관식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교황과 황제의 권력다툼은 교황의 승리 쪽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이후 유럽은 교황중심의 세계로 움직이게 되고 신 중심의 세계를 살게 된 것이다.
오토 1세(Otto I, 912~973) 때 이르러 교황인 요한 12세(Joannes XII, 938?~964)의 파병 요청에 따라 이탈리아로 출정하고 962년 교황으로 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관을 받게 된다. 그 황제관을 받게 될 때 오토 1세는 요한 12세에게 "①황제의 의사에 반대하는 사람은 교황이 될 수 없다. ②서임권은 황제에게 있다." 라는 2가지 조항을 제시하고 요한 12세는 이 요구를 승인하였다.이때까지 본 내용만 하더라도 황제와 교황의 관계에서 황제의 우위가 확실하였다. 오토 1세 때 이르러 황제의 권력은 더욱 막강해 졌고, 교황은 황제에게 어떠한 반항,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였다.대표적으로 11세기에는 하인리히 3세(Heinrich III, 1017~1056)는 로마 교황을 3번이나 바꿨다. 그러나 그는 빨리 죽게되고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4세(Heinrich IV, 1050~1106)가 황제자리를 물려 받게 된다. 아직 나이가 어렸던 황제대신 어머니인 아그네스(Agnes)가 섭정을 하게된다. 남편과는 달리 아그네스는 독실한 신앙심으로 교황의 권력을 강화시켜주게 한다. 섭정이 끝나고 하인리히 4세가 통치를 할 때 교황인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1020 ?~1085)가 1074년, 1075년 사순절 종교회의를 통해서 사제의 결혼금지령과 서임권을 교황에게 돌려라는 조안을 발표한다. 그가 이러한 발표를 하게된 이유는 이렇다.사제의 결혼금지령을 통해서 사람, 성직자를 구분시켜서 성직자의 권위를 강화하려고 했고, 인간ㅡ교황ㅡ신 관계의 구조를 만들려고 했다. 물론 황제는 결혼을 하므로 인간에 속하였으며, 그러한 인간이 어떻게 사제를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가하여 서임권을 교황의 권력에 포함시켜서 교황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했다.당연히 하인리히 4세는 화가나서 1076년 교황을 폐위한다. 이에 대항하여 그레고리오 7세는 1074년 사순절 종교회의에서 황제를 파문(excommunication)시킨다. 그 이후는 모두가 익히 아는 카노사의 굴욕이다.가까스로 사면 받은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편을 들었던 주변의 제후들을 1080년 까지 제거하여 결국 카노사의 굴욕 7년(1085) 만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킨다.그 이후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은 십자군에 의해서 잠시 소강 상태(솔직히 십자군 전쟁에서도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이 있었다. 예를 들면 교황의 명령인 예루살렘의 정복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동부 유럽으로 진출한다거나)를 보이다가, 1215년 제4차 라테란종교회의(Lateran Council)에서 황제의 의미를 Rex와 Imperator로 둘로 나누었다. 곧 Rex는 불완전한 왕이고 Imperator는 완전한 왕을 말한다. 이러한 Imperator가 되기 위해서는 신의 승인 즉, 교황에 의한 대관식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교황과 황제의 권력다툼은 교황의 승리 쪽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이후 유럽은 교황중심의 세계로 움직이게 되고 신 중심의 세계를 살게 된 것이다.
번역되고,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오토 1세(Otto I, 912~973) 때 이르러 교황인 요한 12세(Joannes XII, 938?~964)의 파병 요청에 따라 이탈리아로 출정하고 962년 교황으로 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관을 받게 된다. 그 황제관을 받게 될 때 오토 1세는 요한 12세에게 "①황제의 의사에 반대하는 사람은 교황이 될 수 없다. ②서임권은 황제에게 있다." 라는 2가지 조항을 제시하고 요한 12세는 이 요구를 승인하였다.
이때까지 본 내용만 하더라도 황제와 교황의 관계에서 황제의 우위가 확실하였다. 오토 1세 때 이르러 황제의 권력은 더욱 막강해 졌고, 교황은 황제에게 어떠한 반항,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표적으로 11세기에는 하인리히 3세(Heinrich III, 1017~1056)는 로마 교황을 3번이나 바꿨다. 그러나 그는 빨리 죽게되고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4세(Heinrich IV, 1050~1106)가 황제자리를 물려 받게 된다. 아직 나이가 어렸던 황제대신 어머니인 아그네스(Agnes)가 섭정을 하게된다. 남편과는 달리 아그네스는 독실한 신앙심으로 교황의 권력을 강화시켜주게 한다. 섭정이 끝나고 하인리히 4세가 통치를 할 때 교황인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1020 ?~1085)가 1074년, 1075년 사순절 종교회의를 통해서 사제의 결혼금지령과 서임권을 교황에게 돌려라는 조안을 발표한다. 그가 이러한 발표를 하게된 이유는 이렇다.
사제의 결혼금지령을 통해서 사람, 성직자를 구분시켜서 성직자의 권위를 강화하려고 했고, 인간ㅡ교황ㅡ신 관계의 구조를 만들려고 했다. 물론 황제는 결혼을 하므로 인간에 속하였으며, 그러한 인간이 어떻게 사제를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가하여 서임권을 교황의 권력에 포함시켜서 교황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당연히 하인리히 4세는 화가나서 1076년 교황을 폐위한다. 이에 대항하여 그레고리오 7세는 1074년 사순절 종교회의에서 황제를 파문(excommunication)시킨다. 그 이후는 모두가 익히 아는 카노사의 굴욕이다.
가까스로 사면 받은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편을 들었던 주변의 제후들을 1080년 까지 제거하여 결국 카노사의 굴욕 7년(1085) 만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킨다.
그 이후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은 십자군에 의해서 잠시 소강 상태(솔직히 십자군 전쟁에서도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이 있었다. 예를 들면 교황의 명령인 예루살렘의 정복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동부 유럽으로 진출한다거나)를 보이다가, 1215년 제4차 라테란종교회의(Lateran Council)에서 황제의 의미를 Rex와 Imperator로 둘로 나누었다. 곧 Rex는 불완전한 왕이고 Imperator는 완전한 왕을 말한다. 이러한 Imperator가 되기 위해서는 신의 승인 즉, 교황에 의한 대관식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교황과 황제의 권력다툼은 교황의 승리 쪽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이후 유럽은 교황중심의 세계로 움직이게 되고 신 중심의 세계를 살게 된 것이다.
번역되고, 잠시 기다려주십시오..